‘관계’에 지친 사람들, 술 대신 문화생활…’일시적 만남’도?


가까운 사람들과 모여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곤 하던 송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일시적이고 익명을 내세운 모임에서 안식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은행에 다니는 박선영(30·여) 씨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올해의 마지막 날을 보낼 계획이다. 박 씨는 모임 앱을 통해 주제, 시간, 장소를 정한 뒤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만났다가는 곧 헤어진다. 오는 31일 열리는 영화 모임의 주제는 정우성이 나오는 영화 <강철비>. 박 씨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보다 영화 이야기나 책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알차다”면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잠깐 만나고 헤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영화 등 주제에 따라 일시적 만남
여행도 온라인 카페서 동행 모집
모임 비용 부담에 홀로 보내기도

영업직으로 일하는 김희원(38) 씨는 회사에 갑자기 내려진 ‘연차를 소진하라’는 지시에 급하게 지난 22일 해외여행을 떠나게 됐다. 김 씨는 라오스 여행을 검색해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이들과 패키지 팀을 이뤄서 4박 5일 라오스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이 끝난 지금 동반자들과 여행 사진을 공유하는 것으로 끝이다. 김 씨는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다 보니 친구들과 휴가 맞추기도 어렵다. 또 나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익명성 뒤에 숨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시간과 노력이 드는 관계에 지쳐 일시적이고 목적이 있는 관계를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쉽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환경도 한몫을 했다. 인맥을 관리하고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지친 데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학내일20대 연구소는 신조어로 관계에 지친 이들을 칭하는 ‘관태기(관계+권태기)’라는 용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경제적인 비용도 부담스러운 요소 중 하나다. 공무원 장수진(29) 씨는 올해 연말 고교·대학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보냈다. 장 씨는 “지난 해에 동창회에 갔다가 받은 것은 친구들의 청첩장 뿐이었다”며 “직장 동료와 대학 동기 등 주변 경조사를 챙기느라 너무 돈이 많이 들어 최근에는 사회적 관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동아대 장세훈(사회학과) 교수는 “사실 동창회나 동문회 등 학연을 통해 맺어진 오래된 관계는 선·후배 위계질서가 강하다 보니 젊은이들이 부담스럽다고 여기는 것 같다”면서 “지도층 인사들이야 승진이나 출세에서 학연· 지연 등으로 소위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지만 사실 일반 사람들은 살면서 그럴 일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관계의 필요성을 덜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한국 사회가 코 앞 현실에 충실하기에도 빡빡하다 보니 공동체적 속박을 더욱 무겁고 크게 느껴 반작용이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소희 기자 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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